입맛은 지극히 어린애 취향이었고,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와 가까운 편집왕 알리규라 라던가, 타락왕 페무트만이 그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절망왕이 기생 중이던 몸의 숙주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인지 블랙은 절망왕이 모르는 사이 몰래 설탕과 단 과자들을 조금씩 챙겨주기도 했다. 블랙과 절망왕은 원래 한 몸이었고, 절망왕이 기생하던 관계였지만 거짓말 같게도 하룻밤 사이에 그들의 몸은 분리가 되었다. 그렇게 됨으로 인해서 블랙과 절망왕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절망왕은 블랙에게 기생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몸이 분리된다고 그 사실을 잊는 것도 아니어서, 블랙은 단것을 챙겨놓는 걸 절망왕에게 쉽게 들키는 건 아니겠다며 꽤 좋아했다. 물론 챙겨주는 과정이 들키지 않는 것이지 챙겨준 결과를 들키지 않는 다는 건 아니었다. 절망왕은 그 때마다 화를 내면서 블랙의 방문을 세차게 열어제꼈지만, 그것도 처음 몇 번 뿐이었고, 시간이 지나자 절망왕은 블랙이 챙겨놓은 과자봉지와 초콜릿, 사탕을 보고는 그것들을 향해 살짝 인상쓰더니 한아름 팔 안에 가득 담아 조심조심 옮겨갔다. 염력이라는 편리한 것이 있었지만 딱히 이런데 쓰고싶지 않았나보다. 절망왕은 그 뒤로도 블랙에게 꾸준히 과자, 사탕, 초콜릿같은 군것질거리를 받았고, 알리규라에게서는 초콜릿만, 페무트에게서는 사탕만을 꾸준히 받아왔다. 절망왕은 그것들을 대체 어느곳에 넣어두는 것인지 절망왕의 방은 받은 것들로 산을 이루고도 남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마 그건 착각이었는지 약간의 결벽증까지 가미한 절망왕은 잘도 종류별로 받은 것들을 정리 해놓았다. 그런 절망왕의 방을 볼 때마다 블랙은 깔끔해서 좋네. 라며 웃으며 지나갔고, 그러면 절망왕은 짜증냈다. 항상 같은 레퍼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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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은최근 절망왕에게 이것저것 군것질 거리를 챙겨주기가 어려워졌다. 시간이 흐르며 절망왕이 따로 집을 구해 나갔기 때문이다. 블랙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절망왕은 드디어 해방이라는 듯이 보지못했던 밝은 미소까지 띄우며 집을 나갔다. 절망왕의 집은 블랙의 집에서 남쪽으로 차로 30분가량 걸리는 위치에 있었지만, 블랙은 어김없이 절망왕에게 찾아갔다. 그것도 7일중 4일정도. 하루걸러 찾아가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절망왕은 블랙의 얼굴을 보자마자 인상을 구겼다. 뭐야. 바뀐 게 하나도 없잖아. 짜증난다는 듯이 절망왕은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렸다. 블랙은 그런 절망왕의 표정에 멋쩍게 웃으며 들고 온 나무빛깔의 종이봉투를 살짝 들어올렸다.
"좋아하는 거, 맞지?" "... 그건 또 어디서 들었길래." "그냥, 뭐."
블랙이 그저 웃기만 하며 대답했다. 들어가도 돼? 블랙이 조심스레 묻자 절망왕은 뚱한 표정을 짓다가, 아무 말도 없이 뒤돌아 들어가버렸다. 거절이 아닌 수락의 의미였다. 블랙은 실례하겠습니다. 라며 형식적인 말을 내뱉고는 바로 식탁으로 직행했다. 식탁 위에는 새 집으로 이사오며 아예 제대로 정리하려 한 건지 일반 수납장보다 조금 크기가 작은 수납장과 조금 각진 통이 있었다. 칠각형 모양인걸까나. 꽤나 심플한 통에 절망왕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랙은 입꼬리를 조금 올려 조심스레 미소를 지었다. 블랙은 절망왕이 자신을 진짜 싫어한단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절망왕이라 해도 일단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그 감정 속에서 흔한 애정하나 생기는 건 크게 문제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절망왕도 어찌되었건 일단 인간속에 녹아들었다는 생각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절망왕은 잠깐 어딜 갔었나 했더니 서재로 보이는 곳의 방문을 열고 나왔다. 손에는 하얀 찻잔이 들려져 있었고, 블랙을 보자 아직도 안갔냐는 표정으로 얼굴을 다시 한 번 찡그렸다. 블랙은 그런 절망왕의 얼굴에 그저 베싯 웃으며 자신이 매고 온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이내 비스킷류의 과자 두 봉지와 초콜릿 바 세 개를 꺼냈다. 절망왕은 그 모습을 보고 살짝 아리송하게 보이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블랙을 쳐다보았다.
"또냐." "그렇지만 절망왕, 이거 좋아하니까." "네 먹을 것이나 꼬박꼬박 사라고. 매일 같은 것만 먹으면 질리지도 않나."
절망왕이 그렇게 내뱉으며 블랙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들고있던 찻잔을 식탁 위에 두었다. 절망왕은 블랙이 손으로 밀어 절망왕 자신의 쪽에 가져다 놓은 과자들과 초콜릿들을 보며 손을 뻗어 이것저것 들춰보았다. 저의 취향은 대체 어디에서 주워 듣는 것인지 자신이 제일 좋아하지만 구하기 힘든 비스킷 브랜드의 제품 두 개와, 초콜릿도 자신이 꽤나 좋아하는 회사의 초콜릿을 사왔다. 여전히 싱글싱글 웃고있는 블랙의 표정을 보며, 절망왕은 나름 정리를 해 자신의 옆에 밀어두었다. 블랙은 그런 절망왕의 행동을 보다가, 절망왕의 옆에 놓인 찻잔에 눈이 갔다. 항상 커피만 마시던 절망왕이 오늘은 어째서인지 연붉은 빛을 띄는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의외라는 눈빛으로 잔 안에 담긴 액체를 바라보자 절망왕은 이내 그 시선을 눈치채고는 느릿느릿 말했다.
"페무트가 가져다 줬어." "왜?" "커피말고 홍차가 더 맛있다면서." "많이 줬어?" "아니. 조금."
절망왕이 조금 식어버린 홍차를 입에 대었다. 식었네. 버려야겠다. 절망왕은 그렇게 생각하곤 입을 떼내어 의자에서 일어나곤 찻잔에 담겨 반도 채 줄지 않은 홍차를 그대로 싱크대에 부어버렸다. 절망왕은 지극히 따듯할 때 먹어야 한다는 고집센 그런 주의라서 조금이라도 식어버리면 곧바로 버려버렸다. 절망왕은 싱크대 안 배수관으로 다 흘러가지 않은 홍차 찌꺼기를 마저 씻겨내기 위해 물을 틀어 찌꺼기들을 흘려보냈다. 절망왕은 어느정도 찌꺼기가 다 흘러 간 것 같으니 물을 잠갔다. 그리고 그대로 뒤를 돌아 고개를 삐딱하게 세우며 블랙을 쳐다보았다.
"안 갈거야?" "지금당장 가줬으면 좋겠다는 표정이네." "아니었던 적이 있었나." "그런가. 그나저나 페무트도 참 얄궂어. 너 커피 말곤 거의 마실 수 있는 거 없잖아. 다 입맛에 안맞다며 한 입 마시고 버렸으면서. 저번에 밀크티 기억나? 내가 제일 좋아하던 종류였는데." "아아. 그랬던가. 어쨌든 어서 가버려." "가라면 가야지. 며칠 뒤에 보자." "며칠 뒤?"
그러면 2일 뒤에 안 온다는 소리? 절망왕이 대뜸 들리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응을 했다. 블랙은 그런 절망왕의 모습을 보다가 작게 소리 내어서 웃다가 이내 이유를 말했다.
"잠깐 일이 생겨서 말이야. 레오스에서 호출이 떴거든." "- 그러면 며칠이 아니라 몇 달 동안 안 볼 수도 있겠네." "뭐, 글쎄."
블랙이 어깨를 으쓱이며 잠깐 내려놓았던 가방을 들어올렸다. 절망왕은 어느새 벽에 기대 블랙이 나갈 채비를 하는 것을 꽤나 기쁜 듯이 쳐다보았고, 나갈 때는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좋은가. 블랙이 절망왕을 보고 잠깐 생각하다 자신도 손을 흔들어주곤 절망왕의 집을 나왔다. 그리고 절망왕의 집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절망왕은 이제 곧 블랙의 얼굴을 한 동안 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잠깐 기뻤지만, 블랙 말고도 시끄럽게 찾아오는 페무트는 매우 귀찮은 존재였다. 어떨때는 알리규라까지 찾아와서는 두배로 시끌벅적했다. 절망왕은 아예 헤르살렘즈 롯에서 벗어나야 하나 생각 해보았지만 가장 재밌는 일이 일어나는 곳이 이곳이라, 그 생각은 접기로 했다.
절망왕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조금이라도 더 누리기 위해 다시 서재에 도로 들어갔다. 아까 찾아온 블랙 때문에 읽다가 만 책을 다시 읽으려니 이미 흐름이 끊겨 집중하기가 어려웠고, 그렇다고 다른 책을 찾아보려하니 그건 그것대로 귀찮았다. 애초에 자신은 책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읽는다고 해도 온갖 악마, 마귀, 악령과 관련된 책들 뿐이었다. 절망왕은 꽤나 두꺼운 책을 턱 덮어버리고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선 등받이에 편안히 기댔다. 이 상태로 잘 수 있다면 자기도 충분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깐 눈을 붙이려니, 베란다에 놓아 뒀던 흰 장미에 물을 주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물을 줄까 생각 해보다가 어차피 죽으면 다시 사와도 된다는 생각에 그대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