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왕이 어디선가 가져왔는지 모를 흰 장미를 코 끝에 가져다대어 향기를 맡으며 말했다. 몸서리 칠만큼 이질감이 느껴지는 새하얀 순백의 장미는 그의 이름과는ㅡ실상 절망왕이란 것은 그의 진짜 이름이 아니었지만ㅡ거리가 매우 멀었다. 절망. 바라는 것을 끊다. 말 그대로 희망을 파괴하는, 끊어버리는 존재가 절망이었고, 절망왕은 그 절망의 맨 위였다. 블랙은 그런 절망왕을 쳐다 볼 수 없었다. 괜히 그가 원하는대로 끌려가버릴 것만 같아서. 절망왕은 그런 블랙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눈치 챈 건지 눈을 감고 향을 음미하던 행동을 멈추고는 붉은 두 눈동자로 블랙을 쳐다보았다.
"왜그래. 쳐다봐도 괜찮잖아?"
절망왕이 피식 웃었다. 블랙응 아무 말고 않고 얼마 전에 잘라버렸어야 할 길어버린 손톱을 다른 손톱으로 툭툭 쳤다. 손톱과 손톱끼리 부딪리는 소리가 작게 났다. 틱틱거리는 손톱과 손톱끼리 부딪히는 소리 외에는 그들 사이에서 아무런 소리도 오가지 않았다. 지금의 시간은 몇 시인지 모른다. 어쩌면 자야 할 시간을 훨씬 넘겨버렸을 수도 있었다. 블랙은 그저 흐르는 정적이 어색하다고 느껴지지 않았고, 절망왕은 손에 여전히 흰 장미를 든 채로 시커먼 안개가 뒤덮은 창 밖을 바라보았다. 평소같으면 흰 빛이 대다수고 희뿌옇게 물체의 형상만 좀 흐려보일텐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오늘의 안개는 시커맸다. 무엇 때문인진 모른다. 블랙은 그저 절망왕의 손에 들려있는 흰 장미와 바깥의 시커먼 안개가 대조적이라 생각했다.
절망왕이 블랙의 물음에 잠깐 시선을 돌려 붉은 두 눈동자로 응시하다 아까보다 한껏 풀이 꺾인 채로 대답했다. 그래. 세상은 절망으로 치닫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시작 된 이상기후와 온갖 구울들. 그리고 그 외의 요소로 아무 이유없이 죽어나가는 사람들. 개중이는 블랙이 알거아 알지못한 이들의 수가 숱했다. 아마 구울이나 이상기후로 죽어나가기 보다는 맨 후자로 죽어나가는 것이 사망자 수가 더 많았다. 블랙은 가만히 생각했다. 세계가 멸망, 절망한다는 것은 절망왕이 바라고 있는 것일터였다. 그런게 어찌 슬프다는 듯이 말하는지 블랙으로선 감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절망왕은 창밖에서 드디어 시선을 떼더니 몸을 앞으로 기울여 차주전자를 가볍게 들곤 그 안에 든 내용물을 작지도, 크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흰 색 바탕에 예쁜 꽃 문양들이 그려진 찻잔을 들어올렸다. 차주전자에서 나온 내용물은 그의 눈색보다 조금 옅은 약간 주황색을 띄는 붉은 색의 홍차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외이게도 까만 커피가 흘러나왔다.
"마실래?"
절망왕이 자신이 집어든 찻잔을ㅡ이제 커피가 담겨서 커피잔이겠지만ㅡ살짝 움직여 보이며 블랙에게 물었다. 블랙은 절망왕이 든 찻잔을 잠깐 쳐다보았다. 차주전자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살짝 들어올려 근처의 찻잔에 조심스레 비워냈다. 커피는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가끔은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블랙이 찻잔을 들어 그 안에 있는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자, 절망왕은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블랙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묻고싶은게 많은 얼굴이네." "없진 않으니까.." "뭐야? 어차피 마지막 열차를 타게 된 이상 지금 물어보라고. 다신 기회가 없을 수도 있으니." "... 왜 슬퍼해?" "무슨 소리야."
절망왕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다시 인상을 폈다. 여전히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은 다 지워지지 않았지만 일단은 블랙의 대답을 듣기 위해 기다리기로 결정 한 것 같았다. 블랙은 새카만 커피 위로 비쳐지는 자신의 얼굴을 보다가, 절망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빨간 두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로막는 장애믈 하나 없이, 뚜렷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블랙은 그런 절망왕과 시선을 마주치는 것을 망설이다 이내 절망왕과 눈을 마주쳤다.
"세상이 절망으로 치닫는 건 네가 바라는 것 아냐?" "그렇지." "그런데 슬픈 듯이 말해서." "네녀석과 붙어있다보니 미련함이 옮겨 붙었는 지도 모르지."
절망왕은 그제서야 블랙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다시 커피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이번엔 틱틱 부딪히는 소리 대신 은은한 커피향 만이 그 둘의 사이를 채웠다. 블랙은 아까 절망왕이 바라보던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시커먼 안개는 여전히 걷혀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 곧 세상이 절망으로 잠길텐데 이상하게도 슬프거나 화난다는 감정이 들지 않았다. 마음이 오히려 편했다. 절망왕은 어느새 커피를 반쯤 마시고 내려놓았다.